미국은 왜 '피의사실 공표'에 엄격한가 - 수사기관과 언론은 어떻게 사람을 망가뜨리나

영화 ‘도망자’의 모델이 된 실제 살인사건

 

1954년 7월4일 새벽,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호화 저택에서 한 여성의 시신이 발견됐다. 

그녀의 이름은 '마릴린 리즈 셰퍼드'. 시신을 발견한 사람은 그녀의 남편이자 잘 나가는 뇌 외과의사 샘 셰퍼드(Sam Sheppard)였다. 최초 목격자인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키 큰 수염 난 남자가 아내를 살해하고, 나를 때려 기절시켰다.”

 

하지만 클리블랜드 경찰과 검찰은 셰퍼드를 용의자로 봤다. 그들은 아내 살해 혐의로 그를 기소했다. 

그는 결국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영화 팬이라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줄거리일 것이다.

 

 

맞다. 해리슨 포드 주연의 1993년 영화 ‘도망자(The Fugitive)'의 줄거리다. 

그리고 이 영화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됐다. 

 

영화에서는 아내 살해 혐의로 유죄를 받은 의사(해리슨 포드)가 탈출하고, 연방 보안관(토미 리 존스)의 도움을 받아 누명을 벗고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토미 리 존스는 이 영화의 열연으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영화 ‘도망자’의 해리슨 포드와 실존 인물 샘 셰퍼드 

출처-<영화 홍보자료>

 

안타까운 점은 영화와 현실의 결말이 달랐다는 것이다. 

영화와 달리 실존 인물 셰퍼드는 탈옥하지 않았고, 오랜 기간 감옥살이와 법정 투쟁을 하며 인생이 망가졌다. 

그의 인생을 망가뜨린 주범은 수사기관과 언론이었다. 

 

 

검찰과 언론의 합작

 

검찰은 셰퍼드를 범인으로 찍어놓고 언론에 말을 흘렸다. 당시는 사건 발생 3일 후로 셰퍼드가 기소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검사 생활 23년 동안 샘 셰퍼드처럼 대놓고 수사 방해하는 경우는 못 봤다.”

 

-존 마혼 검사-

 

“샘 셰퍼드가 한 짓이 틀림없다. 남은 일은 자백을 받아내는 것뿐”

 

-검찰 검시관-

 

이라고 말했다. ‘클리블랜드 프레스’ 신문은 이 말을 대서특필했다. 

이후에도 하루가 멀다하고 셰퍼드를 비난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아직 검찰 소환조사나 기소도 안 된 상태임에도 말이다.

 

“샘 셰퍼드가 미모의 아내 살해 여부를 묻는 거짓말 탐지기 검사를 거부했다. 셰퍼드 일가족이 권력을 이용해 수사를 방해하고 있으며 그 결과 수사가 길어지고 있다.” 

 

- 7월 9일 1면 및 사설 -

 

“샘 셰퍼드 7시간 동안 수사 받다.”

 

-7월 10일 신문 내용-

 

 

“샘 셰퍼드, 또다시 거짓말 탐지기 거부하다.”

 

- 7월 11일 신문 내용-

 

“누군가가 살인죄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다”라는 제목과 함께 신문에 게재된 삽화 (7월 20일 사설)

 

“왜 소환조사를 안 하나? 거버 박사(담당 검찰 검시관)은 당장 조사를 실시하라” 

 

- 7월 21일 신문 1면 -

 

재판에 출두한 샘 셰퍼드를 둘러싼 기자들 

출처-<게티 이미지>

 

이 기사가 나오고 검찰은 셰퍼드를 ‘공개적으로’ 소환조사했다. 

5일간의 소환조사는 모두 공개적으로 진행되어 언론이 시시콜콜 받아적었음은 물론이다. 

 

소환조사 과정에서 셰퍼드의 변호사는 검찰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셰퍼드 변호사가 쫓겨나자, 주민들이 환호했다”고 보도한 언론 기사 

 

 

“왜 가장 유력한 용의자를 계속 수사하지 않나”

 

- 7월 28일 사설 -

 

 

“샘 셰퍼드가 왜 아직도 감옥에 갇히지 않았나? (검찰은) 그만 망설이고 빨리 감옥에 가둬라.”

 

- 7월 30일 1면 제목 -

 

위 기사가 나온 날, 검찰은 셰퍼드를 체포하고 기소했다.

 

 

샘 셰퍼드는 왜 미움을 샀나

 

그렇다면 셰퍼드는 왜 이렇게 언론과 검찰의 미움을 샀을까? 

 

한마디로 연예인급으로 잘나가는 엘리트 유명 인사였기 때문이었다.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학창 시절 풋볼, 농구에 능한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공부도 잘해서 의대에 진학했고, 뇌외과 전문의가 되었다. 

사건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30세밖에 안 됐지만, 그는 이미 병원을 경영하며 막대한 부를 쌓은 상태였다. 

외모도 잘생겼고, 아내 또한 상당한 미인이었다. 

그는 모든 걸 가진 채로 호화로운 결혼생활을 즐기는 ‘연예인급 엄친아’였다.

 

1950년대 부부가

수상스키를 탈 정도로

잘 살고 잘나가 보인다.

출처-<게티 이미지>

 

그는 인맥도 화려했다. 커다란 병원을 운영하며 시장 등 지역 유지와도 잘 알고 지냈다. 호수를 낀 호화 주택에서 그들과 파티도 여러 번 벌였다. 살인 사건 전날 밤에도 그들과 함께 파티를 즐겼을 정도였다. 

 

덕분에(?) 셰퍼드는 검찰과 언론이 ‘기득권’ 프레임을 씌우기 안성맞춤인 대상이었다. 돈 많고 잘생긴 의사가 미모의 아내를 살해했다는 ‘프레임’은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검찰은 셰퍼드의 주변을 탈탈 털었다. 그리고 그가 병원 여직원과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검찰은 곧바로 언론에 이 사실을 흘렸다. 범행 동기는 ‘바람기’ 때문이었다는 보도가 거의 확정되었다. 

 

(사건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지자 “내가 셰퍼드 박사의 애인이었고 아들도 낳았다”는 여자들이 등장했고, 언론과 인터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법정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샘 셰퍼드가 여자 5명과

‘문어발 다리’를 걸쳤다고

보도하는 언론 기사

 

검찰과 언론이 ‘짝짜꿍’이 되어 판사를 압박하는 사례도 있었다. 

재판 기간 동안 언론은 담당 판사의 얼굴을 1면에 실으며, 재판을 유죄 분위기로 몰아갔다.

 

 

결국 셰퍼드는 살인 사건 3개월 만에 열린 재판에서 2급 살인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10년 만에 뒤집어진 판결

 

셰퍼드의 가족은 풍비박산났다.

 

 

셰퍼드의 어머니는 아들의  유죄판결 직후 권총 자살  자살했다. 

언론은 신이 나서 이 사실을 연일 1면에 장식했다. 어머니가 사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마저 병으로 사망했다. 

셰퍼드는 손에 수갑을 찬 상태로 부모님의 장례식에 참석해야 했다.  

 

이렇게 비참한 세월을 보내던 그에게 희망이 찾아온 건 감옥에 갇힌 지 10년이나 지나서였다. 

1964년 연방항소법원은  “샘 셰퍼드가 사전혐의 보도로 인해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했다” 며 그를 석방하고 재심을 허가했다. 셰퍼드는 풀려나면서  “유배지에서 풀려나는 드레퓌스의 심정을 알겠다” 고 말했다.

 

10년간의 복역 끝에 풀려나는 샘 셰퍼드

출처-<게티 이미지>

 

1966년에는 연방대법원도 최종적으로 하급심 판결을 뒤집고 재심을 명령했다(Sheppard v. Maxwell). 연방대법원은 판결문에서 셰퍼드의 재판이 공정하게 이뤄지지 못했다고 했다. 그 이유로 검찰과 언론의 피의사실 사전 공표 사실을 지적하며, 이렇게 말했다.

 

“언론에 의한 재판이 있다면, 바로 이 사건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언론이 날뛰는 바람에 공무원, 법원, 배심원은 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언론이 검사, 판사, 배심원 역할까지 도맡아 했다. 언론은 개인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셰퍼드의 변호사는 다음과 같이 언론을 비판했다.

 

“기자들은 기사를 마치 골프채 클럽처럼 휘둘러 사람을 두들겨 팼다. 기자들은 정치인들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했으며,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사람은 위협했다.”

 

검찰은 연방대법원의 재심 판결 직후, 셰퍼드를 재기소했다. 그러나 검찰의 바람과 달리, 1966년 셰퍼드는 배심원 재판에서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결국 무죄를 받았지만, 그의 인생은 이미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망가져 있었다. 

자유의 몸이 된 그는 의사 업무에 복귀했지만, 10년간의 수감생활로 인해 실력이 무뎌져 병원에서 해고된다. 

자신의 직업이었던 의사로서의 삶도 이어갈 수 없게 되자, 그는 방황하며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 

그러다 결국 46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셰퍼드뿐 아니다. 여기 수사기관과 언론의 무책임한 피의사실 공표로 인해,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삶이 망가진 또 한 사람이 있다.

 

 

영웅에서 테러범으로 전락한 경비원

 

이 이야기를 위해선 1996년으로 가야 한다. 1996년에는 일명 ‘애틀랜타 올림픽 폭탄 테러 사건’이라고 불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 애틀랜타 하계올림픽 기간 중 축하 공연장에서 폭탄이 터져 2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눈치 빠른 분들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을 것이다. 

 

‘올림픽 축하 공연장이라면 군중이 밀집해 있을 텐데, 그 속에서 폭탄이 터졌음에도 어떻게 사망자가 2명밖에 안 될 수 있지?’ 

 

이유가 있다. 한 임시직 경비원이 폭탄을 미리 발견하고 군중을 대피시켜 인명피해를 최소화한 것이다. 순식간에 영웅 대접을 받게 된 이 경비원의 이름은 ‘리차드 쥬웰’이었다.

 

리차드 쥬웰

출처-<게티 이미지>

 

FBI를 비롯한 수사기관은 비상이 걸렸다. 전 세계인이 주목하는 올림픽에서 테러가 터졌으니, 하루빨리 범인을 검거해야 한다는 압박이 대단했다. FBI 프로파일링 팀은 테러범의 프로필을 이렇게 분석했다.

 

“홀로 사는 백인 남자로 총기에 능숙하며, 경찰 등 공권력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외로운 늑대형 남자”

 

이 프로필에 맞는 사람을 찾아보니 리차드 쥬웰이 나왔다. 쥬웰은 나이 당시 30대 중반의 나이에 아직 결혼하지 않고 혼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고, 정규직 경찰이 되고 싶어 했지만, 뜻대로 안 되어 임시직만 전전하고 있었다. 또한 총기를 여러 개 보유한 총기 마니아이자 비디오게임 플레이를 즐겼다. 즉, 수사기관이 분석한 조건에 맞는, 만만한 ‘아싸’였다.

 

FBI 국장은 이 부분에 꽂혔다. 

 

“리차드 쥬웰에 대해서 좀 더 조사해 봐!”

 

리차드 쥬웰 범인설을 계속 밀어붙였던

FBI 국장 루이스 프리

출처-<게티 이미지>

 

FBI 국장은 범인을 정해놓은 듯 리차드 쥬웰에 집중했고, FBI 프로파일링 팀은 위에서 까라는 대로 깠다. 결국, 결론은 이렇게 났다.

 

“평소 정규직 경찰관이 되고 싶었던 리차드 쥬웰이 스스로 폭탄을 설치하고 제거하는 자작극을 벌여 영웅으로 대접받고 싶어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는 프로파일링 팀의 예상일 뿐이었고, 이를 뒷받침할 증거는 하나도 없었다. 테러가 발생한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고, FBI는 리차드 쥬웰을 아직 소환조사조차 안 한 상태였다.

 

그러나 ‘올림픽 테러범을 빨리 잡아야 한다’는 압박은 너무나 강했고, FBI는 테러 발생 하루 만에 몇몇 언론에 “리차드 쥬웰을 테러 중요 참고인으로 조사할 예정”이라고 흘렸다. 

 

언론은

‘영웅인 줄 알았던 경비원이 사실은 폭탄을 설치했다’고

대서특필했다. 

출처-<게티 이미지>

 

쥬웰은 하룻밤 사이 언론에 의해 영웅에서 ‘폭탄 테러범’으로 바뀌어 버렸다.

 

“영웅이 사실은 테러범?”

 

“30살 먹고도 엄마 치마폭 안에 있는 마마보이”

 

“실패한 경찰관 지망생”

 

“영웅 심리에 가득 찬 경비원”

 

“그가 연쇄 살인자와 같은 취급을 받을지 주목된다.”

 

“리차드 주웰은 시골 동네 람보, 뚱뚱한 외모의 실패한 경찰 지망생”

 

 

FBI에게 쥬웰은 이미 범인이었다

 

FBI가 리차드 쥬웰을 표적으로 삼고 있음이 명백해졌는데도, FBI는  “그냥 몇 가지 물어보는 것뿐이니 본부로 와라” 고 언론 플레이를 했고, 리차드 쥬웰은 순진하게 이에 낚였다.

 

“내가 당당한데 뭐가 문제야. 게다가 내가 경찰 지망생인데, 수사에 자진해서 협조해야지.”

 

그러나 FBI는 그 후 3개월 동안, 쥬웰을 상대로 압수수색과 미행을 실시했다. 그야말로 탈탈 털었다. 수색영장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1996년 7월 27일 올림픽 센테니얼 공원에서 폭발한 사제 폭발물 설치, 제조와 관련된 장치, 전화번호, 주소, 연락처가 기재된 모든 책, 잡지, 사진...」

 

리차드 쥬웰이 1급 용의자라며,

압수수색 현장을 생중계한 언론보도

 

그럼에도 순진한 쥬웰은 FBI를 계속 믿었다. 그는 요원들에게 말했다.

 

“카펫도 뜯고, 자동차도 다 가져가세요. 수사에 적극 협력하겠소. 내가 아무 짓도 안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FBI는 쥬웰의 자동차까지 압수해 공군 수송기로 FBI 본부까지 실어 갔다. 자동차를 조각조각 분해해 폭탄 장치 여부를 조사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자동차를 압수해 가는 장면

출처-<게티 이미지>

 

FBI는 7시간 동안 쥬웰의 아파트를 구석구석 털었고, 그 현장은 언론을 타고 생중계됐다. 심지어 FBI는 압수수색 과정에서 “방해된다”며 쥬웰과 그 어머니를 아파트 밖으로 쫓아내기까지 했다. 

 

쫓겨나 밖에 있는 쥬웰

출처-<게티 이미지>

 

맨몸으로 아파트 밖으로 쫓겨난 리차드 쥬웰을 언론 카메라들은 인정사정없이 찍어댔다. 쥬웰이 얼마나 굴욕감을 느꼈을지 알 수 없다. 투병 중인 어머니는 충격으로 쓰러졌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하나! 

 

이렇게까지 압수수색 해서 FBI가 가져간 물건은 뭐였을까?

 

-쥬웰이 즐겨보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비디오 테이프 

-쥬웰의 어머니가 수집한 그릇 세트 

-쥬웰 어머니의 속옷 

-CD플레이어

 

CD플레이어의 경우는 FBI가 분해해서 공군 수송기로 워싱턴DC FBI 본부로 실어 갔다. CD플레이어에 폭탄이 설치됐을지도 모른다는 이유였다.

 

 

언론이 행한 광기

 

쥬웰이 사는 아파트에는 3개월 동안

수백 명의 기자들이 몰려들어 난장판을 이뤘다.

출처-<게티 이미지>

 

3개월 동안 언론의 취재 경쟁도 아주 집요했다. 집 밖에 최소 100-200명의 기자들이 고성능 카메라와 붐마이크로 진을 쳤다. 당시 언론의 행태를 몇 가지만 살펴보자.

 

-기자들 몇 명이 돈을 모아 쥬웰의 아파트 바로 맞은편 방을 하루에 1,000달러씩 내고 빌려서, 망원렌즈를 설치하고 24시간 감시했음.

 

-쥬웰이 기르던 애완동물 고양이가 집 안 창가 근처에서 펄쩍 뛰었는데, 그 순간 집 밖에서 카메라 플래시 수십 개가 파바박 터졌을 정도로 실시간으로 감시했음.

 

-쥬웰이 아파트로 피자 배달을 시켰더니, 기자들이 피자 배달부에게 돈을 주고 매수했음. 피자 배달부가 아파트 문을 두들기고 쥬웰이 문을 열자, 기자들이 문틈 사이로 카메라를 들이대고 마구 사진을 찍어댔음.

 

 

끝까지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문제는 FBI가 이렇게까지 하며 3개월간 탈탈 털었음에도, 체포할 정도로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언론도 짜증을 내기 시작했고, FBI도 헛다리 짚었다 싶었지만 ‘높으신 분’이 계속 밀어붙이니 그만둘 수가 없었다. 

 

결국 쥬웰의 가족은 기자회견을 갖고 호소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님, 제발 우리 가족 좀 살려주세요. 우리 아들은 결백합니다.”

 

기자회견 하는 쥬웰과 어머니

출처-<게티 이미지>

 

결국 수사 3개월 만에 FBI는 한 차례 더 쥬웰을 소환 조사한 후  “리차드 쥬웰은 폭탄 테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는 편지 한 장을 주고, 그에 대한 사건을 종결했다.

 

FBI는 수사 종결과 함께 압수수색 한 물품, 그릇, 속옷, 전화번호부, 디즈니 비디오테입 등 수백 가지 물품을 돌려주었다. 하지만 돌려준 물품은 쥬웰이 알아서 가져가라고 했다. 쥬웰의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FBI가 압수한 물품은 평범한 중산층 시민의 소지품에 불과했다. FBI가 이 물건들을 가져가는 데 7시간이 걸렸지만, 돌려주는 데 걸린 시간은 4분에 불과했다.”

 

FBI의 수사는 종결됐지만, 쥬웰이 완전히 지옥에서 벗어난 건 아니었다. 쥬웰과 폭탄 테러가 관련이 없다는 수사 결과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계속 그를 의심했다. 그로 인해 쥬웰은 5년간 ‘폭탄 테러범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때문에 취직도 하지 못했다.  

 

그가 누명을 벗은 것은 테러 발생 5년이 지나고, 진범인 ‘에릭 루돌프’가 체포된 이후였다.

 

폭탄 테러 5년 만에 체포된 진범 에릭 루돌프

출처-<FBI>

 

‘리차드 쥬웰 진범설’을 밀어붙였던 FBI 국장 루이스 프리는 국회 청문회에서 탈탈 털린 후 사임했다. 진범 체포 후, 리차드 쥬웰은 오보를 냈던 언론들을 (몇 년에 걸쳐) 고소하여 수백만 달러의 합의금을 받아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그 돈을 써 볼 여유도 없이 44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했다. 

 

 

이 사건도 샘 셰퍼드 사건처럼 대중 작품으로 제작됐다. 2019년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리차드 쥬얼’이란 제목으로 영화화했고, 2020년에는 ‘맨헌트-죽음의 게임’이라는 제목으로 10부작 드라마화됐다. 

 

두 작품 모두 케이블TV 또는 스트리밍으로 한국에서 시청할 수 있다. 영화와 드라마 모두 실제 사건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한 번 시청해 보길 권한다. 

 

 

언론 자유의 범위

 

처음에 언급했던 샘 셰퍼드 사건을 통해, 미연방대법원은 수사기관의 '피의사실 사전 공표'와 언론의 무책임한 취재 경쟁에 대해 이렇게 판결하고 있다.

 

“재판은 선거가 아니다. 군중 모임이나, 라디오, 신문에 의해 재판이 이뤄져서는 안 된다. 언론의 자유는 모든 법적 절차 과정에서 최대한 보장되어야 하나, 그것이 재판의 원래 목적인 공정성을 혼란시킬 정도로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판결은 공개된 법정에서 제출된 증거에 기반해서만 이뤄져야 한다.” 

 

- Sheppard v. Maxwell, 384 U.S. 333 (1966)  (링크)  -

 

샘 셰퍼드 사건으로 인해, 미연방대법원은 위와 같이 언급하며 수사기관의 '피의사실 사전 공표'를 금지하는 판결을 내렸다(다른 사건도 있지만, 샘 셰퍼드 사건이 대표적). 리차드 쥬웰 사건에 관해서도 판례가 나왔는데, 이 때는 언론의 무책임한 무차별 보도를 금지하는 데에 좀 더 집중한 판결이 나왔다. 물론 이 사건에서도 법원은 수사기관의 '피의사실 사전 공표'를 경고했다.

 

피의 사실 공표와 언론의 무차별 보도는 말 그대로 사람의 삶을 끝장낸다. 결국 누명을 벗었지만, 샘 셰퍼드나 리차드 쥬웰이 40대 중반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과거에 있던 이런 사례들을 통해 현재 미국 사회는 과거의 잘못을 굉장히 경계하고 있다. 그 일례로, 할리우드는 이 사건들을 영화화할 때 당시 수사관과 언론인의 실명을 그대로 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 ‘리차드 쥬웰’에서

기자 역할을 맡은 배우 올리비아 와일드.

사건 당시 FBI의 정보를 받아 기사를 쓴

기자의 실명을 영화에서 그대로 사용했다. 

출처-<영화 홍보자료>

 

필자는 본 기사에서 실제 신문 기사와 사진을 일부러 많이 첨부했다. 왜냐하면 한 번 써진 기사는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어딘가에서는 영원히 ‘박제’되기 때문이다. 

 

출처-<연합뉴스>

 

한국에서도 최근 수사기관의 피의사실 사전 공표와 언론의 취재 경쟁으로 비극이 발생했다. 안타깝게도 수사 기관과 언론 모두 뚜렷하게 책임을 지거나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 것 같다. 부디 이번 사건을 교훈 삼아, 한국에서도 수사기관의 피의사실 사전 공표와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를 경계하는 의식과 행동이 자리잡히길 바란다.   

 

충무로도 할리우드처럼 몇십 년 지난 오보에 대해서도 기자 실명을 그대로 쓰며 영화화하여 역사에 남기는 움직임이 일어나길 바란다. 한두 글자씩 이름을 다르게 하여 가명으로 영화화하지 말고. 

 

한국 국민들도 수사기관과 언론이 잘못된 방향으로 여론재판 혹은 마녀사냥을 유도할 때, 그를 경계하며 오히려 수사기관과 언론을 향해 거침없는 비판을 쏟아내는 의식이 자리잡히길 바란다. 그러한 의식이 자리 잡지 않으면, 무책임한 여론 재판은 사라지기 힘들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미연방대법원의 말을 인용하며 기사를 마친다. 

 

“언론의 자유는 모든 법적 절차 과정에서 최대한 보장되어야 하나, 그것이 재판의 원래 목적인 공정성을 혼란시킬 정도로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https://www.ddanzi.com/ddanziNews/797065019

영화 리차드 쥬얼"을 보고 검색하다가 좋은 내용이라 올려봅니다